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누스 1세 (문단 편집) == 잔혹한 가족사 == '''가족관계는 매우 좋지 못한 것을 넘어서 잔혹했으며 막장이었다.''' 로마 제국의 지배자로 출세하기 위해 307년 조강지처인 [[미네르비나]][* 시리아 출신이다.]와 이혼하고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딸 파우스타와 재혼했다.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도 똑같은 행동을 했었는데, 역시 조강지처이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친모인 헬레나와 이혼하고 292년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장녀 테오도라와 재혼했다. 이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어머니 핼레나와 함께 쫓겨나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로마 제국의 지배자기 되기 위한 냉혹한 경쟁 과정에서 장인인 [[막시미아누스]]와 처남인 [[막센티우스]]를 죽였다. 여동생이 여러 차례 화해를 시도했지만 매제인 [[리키니우스]]를 끝내 반역죄로 살해했다. 또한 유능한 장남이었던 [[크리스푸스]]를, 황후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와 간통했다는 혐의를 씌어 모진 고문을 가한 후 죽였다. 장남 플라비우스 크리스푸스(Flavius Crispus)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미네르비나에게서 난 아들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딸 파우스타와 재혼하기 위해 미네르비나를 버렸다. 크리스푸스는 317년 부제에 임명되어 갈리아를 통치했다. 그는 교양과 덕성을 겸비하여 신민들로부터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318년, 320년, 323년의 게르만족 토벌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324년 부황 콘스탄티누스 1세와 동방 황제 [[리키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기 위해 내전을 벌이게 되자 아버지를 도와 합류하면서 해군의 지휘를 맡아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에서 거의 2배가 넘는 [[리키니우스]]의 해군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어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유일무이한 최고 통치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승리를 통해 젊은 황태자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고, 로마 시민들의 존경과 애정이 쏟아졌다.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집권 20주년 경축 행사가 성대하게 열리는 와중에 크리스푸스는 황제의 명령으로 갑자기 체포되었다. 그는 로마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게 비밀리에 이스트리아의 폴라 요새로 압송되었다. 크리스푸스는 정당한 재판 절차없이 계모인 황후 파우스타와 간통했다는 패륜 혐의를 받고, 가혹한 고문을 밤낮으로 받았다. 크리스푸스는 잔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부인했으나 끝내 29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크리스푸스의 계모이자 황후인 파우스타 역시 몇 개월 후 간통 혐의로 뜨거운 욕탕에 가두어져 처형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조시무스]]는 황후 파우스타가 목욕 사우나와 열탕이 결합된 형태의 칼리다리움 안에서 처형되었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그녀가 칼리다리움을 달궈 안에서 삶아지듯 열사된 건지, 아니면 문이 잠긴 다음 칼리다리움 안의 증기로 질식사했는지는 불명확하다. 이떤 방식으로 파우스타가 죽었던 간에, 로마 시대에 칼리다리움은 임신을 원치 않던 여성들이 자연유산을 위해 사용한 적이 있었고, 조시무스는 죽었다는 말 대신 처형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시무스의 기록과는 별개로, 당시 콘스탄티누스 1세의 관료들은 다음날 >"황후가 목욕하던 중 급사했다." 고 발표했으며, 두 사람은 모두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의 연이은 죽음에 대해, 그들이 실제로 간통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간통설 외에도 파우스타의 간계에 속아 아들을 잃은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복수했는다는 가설[* 이 가설의 경우, 파우스타가 처형된 이후, 복수에 성공한 아버지가 죽은 아들의 기록말살형을 철회해야 했다는 반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반박에 관해, 도미나투스 체제 안에서 절대군주이자 신의 대리인이기도 한 황제가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담이 있고 곤란에 처해진다는 합리적인 재반박이 나오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모후 헬레나가 파우스타를 모함했다는 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정치 숙청에 두 사람이 제물이 되었다는 가설 등도 나온다. 이 외에도 파우스타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아버지가 내린 기록말살형 철회를 언급하거나 재검토하지 않았던 이유 등도 궁금증을 더하는 터라 아직까지 여러 가설들이 나돌고 있는 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